[창업] 아뜰리에 김기준 | 베를린의 공인건축사로 홀로서기

독일에서 인기있는 직업엔 어떤 것이 있을까? 굳이 구글이나 시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집을 나서 10분만 거리를 걷다보면 알수 있는 직종이 있다. 바로 건축가다. 수백년의 역사를 품은 고성에서부터 최첨단 기술을 입은 고층 빌딩까지, 독일은 건축가의 손길이 끊임없이 필요한 곳이다. 특히 수도인 베를린은 분단의 역사로 허물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전 세계 건축가들이 한데 모인 각축장이 되었고, 여전히 팽창하고 있다. 건축가 또는 관련 업종에 꿈을 가진 사람에게 매력적인 도시다.

그런만큼 최근 몇년 사이 한국인 건축가들의 활동이 부쩍 눈에 띈다.  지금부터 소개할 아뜰리에 김기준(Atelier KI JUN KIM)의 김기준 소장이 대표적이다. ‘빌머스도르프에 이런 곳이?’하는 놀라움을 안긴 쿡스코헨(KooksKochen), 현대차의 이노베이션센터인 현대 크래들 베를린(Hyndai cradle berlin) 등 한국과 독일, 더 나아가 유럽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유학부터 취업, 독립까지 정공법으로 차근차근 베를린에 정착한 김기준 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80년생
고려대학교 건축학 학사
스위스 연방 공대 건축학 수학
베를린 예술대학교 건축학 석사
2017년 아뜰리에 김기준 설립

WEB www.kijunkim.com


스위스와 독일로 건축유학을 떠나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선지는 ‘스위스’였다. 대학 졸업 직전 건축 설계를 배웠던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베니스에서 활동하던 분이었는데 덕분에 역사와 맥락을 중시하며 도시의 이야기를 건물로 끌어들이는 유럽 건축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스위스의 건축 거장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에 매료됐던 나는 스위스 유학을 결심했다. 목표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대. 그 전에 학교에서 요구하는 C2레벨의 독일어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스위스보다는 물가가 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10개월 간 어학 코스를 밟았다.

 

한국과 달리 스위스의 학부는 3년이다. 그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들, 깨끗한 거리, 보수적이지만 친절한 사람들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유학생활은 즐거웠지만 여러모로 녹록치 않았다. 3, 4번째 학기 후에 2번의 시험을 봤는데, 잘 못봤다. 처음부터 다시 수업 듣거나 학교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 학업을 연장하는 것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초심으로 돌아가 스위스로 나를 이끈 건축가의 사무실에 인턴 지원을 했는데, 운이 좋게도 붙었다.

 

페터 춤투어의 사무실은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쿠어 근교 할덴슈타인에 위치했다. 약 1년간 근무 했는데, 일을 시작하고 3주 후 페터 춤투어가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는 경사가 따랐다. 지원 시점이 조금만 늦었어도 수없이 밀려 들어오는 포트폴리오들 속에 내 지원서가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수상으로 인해 분위기도 좋았고 완공 직전 혹은 계획 중인 프로젝트들이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어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당시 사무실엔 15명 내외의 직원들이 근무했으며 건축가나 인턴의 경우 굉장히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업무는 꽤 강도가 높았는데, 정해진 근로시간은 있었지만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모형 작업 및 이를 사용한 이미지 작업을 주 업무로 맡았고 마지막 3개월은 바젤 미술관의 확장공사 설계 공모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참여했다.

 

한국에서 학사와 6개월의 실무 경험을 한 후 유학을 왔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취리히 연방 공대 학사와 2곳에서 인턴을 했다. 독일로 넘어왔을 땐 내 나이가 만으로 28세 였다. 학부 시절부터 독립에 대한 욕구가 강했고 이를 위해선 석사 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독일은 학교 교육을 신뢰하는 구조를 가졌지 않나. 마침 취리히 공대의 조교수가 베를린 예술대 출신이었는데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석사 과정 장학생 제도를 알려줬다. 베를린 예술대학교의 디플롬(학사+석사) 과정 중간으로 편입했고, 2년간 장학금을 받았다.

* 독일학술교류처(Deutscher Akademischer Austauschdienst) | 비영리사단법인(e.V.)으로 대학생들과 연구원(학자)들의 국제적 교류를 지원하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원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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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앤 디너의 수장이자 건축가 로거 디너와 함께.

건축가에게 중요한 실무 경험
베를린의 직장 생활 

 

학업을 마치자마자 독립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무 경험을 더욱 탄탄히 쌓고 싶었다. 취업 당시였던 2011년은 베를린이 한창 팽창하던 시기로 건축 업계 취업이 어렵지 않았다. 첫번째 일했던 곳은 디너 앤 디너(Diener & Diener Architekten)라는 8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설계사무소로, 바젤과 베를린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일하는 동안 런던의 레스토랑 프로젝트, 자연사 박물관 리노베이 션 중 계단실 실시 설계, 그리고2012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 초대 전시로 출품된 ‘Common Pavilion’에 참여했다.

그 후엔 독일-미국인 부부 건축가가 운영하는 바르코프 라이빙거(Barkow Leibinger) 사무소로 이직했다. 이곳은 2010년 이후 여러 공모전에 당선되며 베를린의 대표적인 건축사무소로 자리잡은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1년 반 동안 7-8개의 공모전에 연달아 참여하게 됐다. 초반에 직접 참여한 두 공모전이 연달아 당선되면서 금새 회사에 적응하고 보람도 느꼈지만, 이내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참여한 프로젝트로는 독일 베를린 에스트렐 타워 공모전, 뒤셀도르프 내 독일 시멘트 협회 본사 공모 전, 그리고 트럼프 사의 로지스틱 센터 건물 실시 설계 프로젝트 등이 있다.

 

바코우 라이빙어에서의 첫 공모전이었던 에스트렐 타워 공모전이었다. 베를린 존넨알레에 위치한 에스트렐 호텔 맞은편 독일에서 가장 높은 175미터 타워형 호텔 및 컨퍼런스 센터를 설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팀웍을 이룬데다 디자인을 뽑아내는데 큰 역할을 해서 더욱 의미있었다. 다수의 공모전 당선을 통해 독일어권 중심의 건축 공모전 성과에 자심감이 붙었다. 한국이 아닌 독일에서의 독립을 결정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다양한 규모,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 건축사무소를 경험을 통해 더욱 폭넓은 학문적, 기술적 스펙트럼을 갖게 된다. 페터 춤토어의 작업 방식이 건축가 개인적인 영감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면, 디너 앤 디 너 건축사무소의 프로젝트의 접근, 발전 방식은 좀 더 집단지성적이며 아카데믹한 측면이 존재한다. 또 바르코프 라이빙거의 경우엔 실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건축으로 공모전을 통해 거의 모든 가능성을 실험해보려는 의지가 강했다.

 

근무 환경의 경우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차이점 중 하나가 ‘알아서. 스스로.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관리자 혹은 선임의 가이드나 코칭이 거의 없다. 이곳에선 일을 줬을 때 그 일을 알아서 잘 해내지 못하면 그 다음엔 시키지 않는다. 못한다고 불러서 혼을 내거나 가르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학사나 석사 과정 중에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땐 학생이니까. 스스로 부딪치고 깨지며 교수님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직장 생활에선?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줄다보면 어느새 내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건축가의 연봉은 이곳에서도(!) 높지 않다. 지역과 회사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급여 비교 사이트인 gehaltsvergleich.com에서 검색한 결과 2021년 베를린 주 40시간 근무 기준 건축가의 평균 연봉은 세전 30.789-45.210유로다. 그리고 이곳에도 야근, 주말 근무가 있다. 단 이를 프로젝트가 끝난 후 한꺼번에 쉬게 해 주거나 연말 상여금으로 보상한다. 물론 대형 프로젝트나 공모전에 참여하지 않는 소규모 사무소에 취업하면 많은 이들이 독일 취업에서 원하는 ‘워라밸’을 챙길 수 있으니, 선택하기 나름이다.


 

프리드리히스하인에 위치한 아뜰리에 김기준 사무실.

유럽에서의 10년, 독립의 꿈을 이루다 

 

학업이든 공부든, 보통 5-6년간 해외 생활을 하면 돌아갈 것인가 혹은 남을 것인가를 선택하게 된다. 취업이라면 모르겠지만 독일에서 독립을 하고 싶다면 이제부터 기회가 주어진다. 부지런히 과정을 밟았다면 학업 최소 4년, 실무 2년을 포함해 ‘독일 건축의 9단계’를 두루 익혔을 즈음이다. 그러면 각 주 혹은 시의 건축사협회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다. 이는 한국으로 따지면 ‘건축사’*의 타이틀을 딴 것과 같다. 2015년, 바코우 라이빙어의 경험을 마지막으로 회원 등록을 위한 모든 자격을 채웠다. 그때부터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건축사협회 | 베를린 건축사협회에는 건축, 도시 계획, 조경 및 인테리어 디자인 분야의 회원 9,390명이 활동 중이다.
✓ 베를린 건축사 협회(Architektenkammer Berlin) 회원 등록 방법 확인하기!
* 건축사? 건축가? | 한국에선 건축사와 건축사 두 용어가 분리되어 있다. 면허가 있으면 건축사, 그렇지 않으면 건축가로 활동할 수 있다. 독일엔 이러한 분류없이 ‘아키텍트’로  통칭하되 건축사협회에 ‘등록된’ 아키텍트와 그렇지 않은 아키텍트가 있다.   

 

독립을 원한다면 필수다. 아키텍트라는 직업은 통상적으로 한 사회나 국가의 면허가 필수적인 직업임을 염두하길. 건물의 용도나 내부를 변경할 때, 새로운 구조를 만들 때 등록 건축사만이 허가된 설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초기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연스럽게 기반을 잡는 사무소들도 있지만, 그러지 못했다. 박봉인 설계사무소 월급으로 모아 놓은 돈이 5000유로 밖에 안됐다. 대신 지난 5년간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 받은 1년 간의 실업 급여(월급의 60%), 그리고  창업지원금(Gründungszuschuss)*이 연료가 됐다.

 

창업지원금을 알게된 건 당시 일하던 사무소 동료를 통해서였다. 나보다 앞서 독립했던 그리스 출신 동료였는데, 실업 급여 종료 6개월 전 노동청에 사업계획서를 제출, 그 타당성을 인정받으면 창업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사업계획서 초안을 만들 때도 도와줬다. 그래서 5개월은 실업 급여, 7개월은 창업지원금으로 받았다. 금액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실업 급여를 받을 때처럼 구직 활동 증명을 하지 않아도 되서 독립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 창업지원금(Gründungszuschuss) | 각 주별로 다양한 창업지원 정책이 마련되어 있다.
✓ 독밥의 ‘베를린 창업·스타트업 지원 정책 총정리’기사에서 확인하기!

 

첫번째 해는 창업지원금으로. 두번째 해는 대학교 건축과에서 겸임교수로 설계 수업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처음 맡게 된 프로젝트는 2018년 베를린 빌머스도르프 지역에 위치한 한식당의 설계 및 인테리어였다. 이를 시작으로 3건의 실내건축 그리고 1건의 오피스 파사드 및 저층부 디자인을 진행했다. 한국이라면 5년이란 시간 동안 많은 작업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보다 젊은 건축가들에게 기회의 폭이 훨씬 좁은 독일에서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있다.

 

최근에 마친 현대 크래들 베를린 사무소다. 현대 크래들은 현대차의 글로벌 이노베이션 센터로 실리콘 밸리, 상하이, 텔아비브, 베를린에 지점을 두고 있다. 이 지점들은 인공지능, 모빌리티,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로봇 등 미래 모빌리티 핵심 분야의 혁신을 이끄는 현지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현대자동차가 ‘디자인’에 강점이 있는 기업이다 보니 컨셉을 잡을 때나 소통할 때 인사이트가 좋고 생산적인 피드백이 오갔다. 이들의 정체성을 인테리어에 담아내는 작업, 예를 들면  항균 기능을 가진 패브릭, 자외선 살균 램프 등 현대 크래들이 투자하는 스타트업의 제품을 접목시키는 작업 또한 흥미로웠다. 시공의 경우 현대차의 국제적 위상 덕에 실력 좋은 종합 시공사와 일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코로나 19의 위기도 피해갔다. 3월에 선정되어 5월부터 본격적으로 설계, 시공을 거의 마칠즈음 하드록다운이 왔다. 총 7개월이 걸렸고 2020년 12월 초 완공됐다.

 

아뜰리에 김기준의 첫번째 프로젝트 쿡스코헨.

 

서울의 스튜디오 인 로코와 협업, 역동적인 유리 장막이 돋보이는 신한은행 파사드 프로젝트.

 

클라이언트 기업과 베를린이 가진 정체성,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한 현대 크래들 베를린 사무소 프로젝트.

 

근사한 디자인과 도면을 그리는 것 외에도 중요한 일들이 많다. 일단 프로젝트를 따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가진 건축적 이상, 아이디어 및 설계를 구현하는데 쓰는 에너지가 2라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공모전 참여, 계약 등을 하는데 쓰는 에너지가 8정도된다. 인턴십, 취업 시 설계 뿐 아니라 대표들의 업무 즉, 기회를 만들고 매력을 어필하는 방법, 클라이언트와의 소통 방법 등도 잘 살펴보길 바란다. 또 설계부터 시작해 시공, 완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결정이 필요하다. 이때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생각의 코어가 중요하다. 프로젝트가 위치한 도시, 지역적 상황 그리고 건축주의 성격이나 예산 등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결정들을 되도록 일관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도 중요하다. 클라이언트 뿐만 아니라 공사장 노동자들과도 소통을 해야한다. 발음 보다도 원하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고 알아들을 수 있으면 된다.

 

코로나 팬데믹의 악재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베를린 국제공항이 드디어 오픈했다. 베를린은 유럽 스타트업의 중심으로 뜨고 있고 이에 따라 세계적인 기업들도 베를린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테슬라와 현대 크래들이 그 예다. 상황이 나아지면 더 많은 인력이 모여들고 따라서 건축에도 다양한 프로젝트가 생길 것이다. 베를린 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를 봐도 건축설계 관련 일자리는 많다.

 

사진 : Atelier KI JUN KIM 제공